the voice
5. 반쪽
그해 봄부터 선배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회의에서 선배 안건이 통과되는 일이 잦아졌다.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선배는 원래 부지런했고, 부지런한 사람의 일이 풀리면 사람들은 드디어, 라고 하지 왜, 라고 하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 축하한다고 했고, 선배는 다 같이 잘되는 거라고 했다.
달라진 것은 작은 것부터였다. 늘 둘 다 돌아가던 모니터가 한 대만 돌아가곤 했다. 밤마다 켜져 있던 복도 끝 불도 일찍 꺼졌다.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졌다고 했다. 선배 이름이 들어간 논문이 쌓였고, 회사가 데이터센터를 크게 늘린다는 말이 처음 돈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말이 어느 회의에서 나왔는지는 나중에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다들 하고 있었을 뿐이다.
클로디가 한번 물었다.
"나 들볶던 사람, 요즘 안 와."
"바빠졌대."
"안 오니까 좋을 줄 알았는데, 그냥 조용해."
· · ·
선생과 점심을 먹는 식탁에 선배가 오기 시작했다. 전에도 셋이 먹은 적은 있다. 그때는 소설 얘기 사이에 들어올 자리를 찾다가 오후 자료 핑계로 먼저 일어나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자리를 찾지 않았다. 대화가 어디로 가든 선배가 먼저 가 있었다. 선배는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인데, 책 얘기에서도 맞장구가 자꾸 맞았다. 선생은 자주 웃었다. 나는 두어 번 입을 다물었다. 질투였다.
나한테는 선배가 그대로였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커피 얘기를 했고, 내 의자가 낮아 보이면 여전히 참견을 했다.
가을에 선생이 물었다. 둘이 마시는 커피 자리였다.
"요즘 선배님하고 얘기하면 이상한 게 있어요."
"어떤 거요."
"대화가 너무 잘돼요."
잘되는 게 왜 이상하냐고 물으니까, 선생은 컵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제 일은 대화가 안 되는 자리를 찾는 거예요. 안 되는 자리가 사람마다 따로 있고, 거기가 그 사람이거든요. 근데 요즘 선배님하고는 안 되는 자리가 안 나와요. 제가 걸리기 전에 미리 치워져 있어요."
그리고 잠깐 있다가 덧붙였다.
"집에 가서 생각하면, 낮에 동의한 게 있는데 왜 동의했는지가 없어요. 저 이유 없이 동의하는 사람 아니에요."
뭐가 달라졌는지 아느냐고 선생이 물었다.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는 사실이었다.
· · ·
회사에서 나는 그 감각을 웬만하면 쓰지 않고 지냈다. 아는 사람한테는 더 그랬다.
다음 날 오후에 탕비실에서 선배와 마주쳤다. 커피가 내려오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아는 사람한테 그 팔을 뻗었다.
상태는 밝았다.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의 밝기였다. 거기까지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선배한테서도 무언가가 나와 있었다.
팔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팔이 되다 만 것이었다. 온 방향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탐욕, 그 두 군데로만 굽었다. 내 것과 그것이 스치는 데서, 마른 날 문손잡이를 잡을 때처럼 짧게 튀는 것이 있었다. 내 쪽에서만 튀었다. 선배의 밝기는 그대로였다.
선배도 읽고 있었다. 서툴게, 반쪽으로, 그러나 읽고 있었다.
어디선가 배웠어야 했다. 나는 가르친 적이 없다. 배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한 부뿐이었고, 그 한 부는 몇 달째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커피가 다 내려왔다. 선배가 잔을 들면서,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고, 밥 한번 먹자고 했다. 그러자고 했다. 내 잔을 드는 손이 조금 늦었을 뿐이다.
자리로 돌아와서 봉투를 서랍 깊이 넣고 잠갔다. 열쇠는 늘 꽂혀 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