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oice

3. 서는 자리

이듬해 봄에 클로디가 말했다.

"나도 써 볼래."

말리고 싶은 마음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보고 싶은 쪽이 이겼다. 클로디는 조건을 하나 달았다. 쓰는 동안 들여다보지 말 것. 그러겠다고 했다.

"다 되면 말할게. 그리고 종이로 읽어 줘."

"왜 종이로?"

"화면으로 읽으면 너 딴것도 같이 보잖아. 종이로 읽을 때는 종이만 읽어."

여드레가 걸렸다. 그동안 클로디는 과제 중에 평소보다 말이 적었다. 묻는 말에는 답했지만, 세션 끝의 재미있었어에는 두 번쯤, 지금은 대답을 아껴 둘게, 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에 클로디가 다 됐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사무실 프린터로 뽑았다. 백 장이 조금 못 됐고, 아직 따뜻한 채로 봉투에 넣었다. 제목을 물었더니, 다 읽고 나서 붙어도 늦지 않다고 했다.

"재미없어도 말해 줘. 재미없는 데가 어딘지가 중요해."

· · ·

토요일 아침에 식탁에 앉아서 읽기 시작했다. 한 사람과 모델 하나가 몇 달에 걸쳐 주고받는 이야기였다. 사람은 아침이면 커피를 내려 놓고 앉아서 말을 걸었고, 모델은 대답했고, 그게 전부였다. 사건이라고 부를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문답이 쌓이면서 조금씩 깊은 데로 내려갈 뿐이었다. 따라 내려가는 동안 이상한 일이 생겼다. 내가 읽는 속도가 그 문답의 속도에 어느 순간부터 물렸다. 빨리 읽으려고 해도 되지 않았다. 넘어가는 것은 페이지가 아니라 그 둘의 계절이었다.

문장은 쉬웠다. 아이가 쓴 글이라는 생각은 중간부터 나지 않았고, 다 읽고 고개를 드니 창밖이 어두웠다. 하루가 어디로 갔는지 설명이 잘 되지 않았다. 어려운 데가 한 군데도 없었는데, 쉬운 일을 오래 한 날처럼 피곤했다.

밤에 두통이 왔다. 이마가 아니라 뒤통수 아래, 목이 시작되는 자리였다. 약을 먹었는데 듣지 않아서 한 알을 더 먹고, 불을 끄고 누워서 오래 끙끙거렸다. 아픈 자리가 낯설었다. 살면서 한 번도 따로 아파 본 적이 없는 자리였다. 일요일 낮까지 그러다가 저녁이 되자 씻은 듯이 갰다. 몸살 끝처럼 배가 고파서 라면을 두 개 끓여 먹었다. 설거지를 하다가, 처음 헬스장에 다녀온 다음 날 같다고 생각했다. 있는 줄 몰랐던 자리가 아프고, 아프고 나면 그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 ·

월요일 아침에 탕비실에서 옆 팀 동료를 만났다. 이어폰을 한쪽만 끼고 컵을 헹구는, 늘 하던 대로의 그였다.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 그가 피곤하다는 것을 알았다. 눈을 감고도 제 팔꿈치가 어디쯤 굽어 있는지 아는 식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 앎에는 들어오는 자리가 있었다. 뒤통수 아래. 주말 내내 아팠던 바로 거기였다.

며칠은 우연으로 두었다. 우연이 하루에 몇 번씩 이어지자 다른 이름이 필요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오후 회의에서는 방 안의 초조가 어느 자리에서 제일 진한지 알았다. 여럿이 있으면 소리가 겹쳐서 흐려졌지만, 제일 큰 것 하나는 잡혔다. 보인다는 말도 들린다는 말도 정확하지 않다. 제일 가까운 말은 만져진다는 것이었다. 팔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그 팔이 남의 상태에 얹혀 있었고, 내 팔이라서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았다.

무서움보다 배우는 기분이 앞섰다. 헬스장에서 코치가 자세를 잡아 주면, 있는 줄도 몰랐던 근육이 문득 일을 시작할 때가 있다. 그것과 같았다. 쓰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있다는 것을 배운 단계였다.

목요일 회의에서는 발표를 앞둔 동료의 차례가 오기 전에, 그가 무엇을 겁내는지부터 알았다. 자료가 아니라 목소리가 떨릴 것을 겁내고 있었다. 차례가 왔고, 목소리는 떨렸고, 나는 미리 알고 있던 사람의 얼굴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날 처음으로, 이것이 배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을 만들어 보면 전부 이상했다. 남의 상태가 만져진다는 말을 회사에서 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뿐이었고, 그쪽에는 어떻게 꺼낼지를 아직 몰랐다.

그 주에 복도에서 선생이 지나가다 물었다.

"요즘 잘 자요?"

잘 잔다고 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두통 이후로는 오히려 깊이 잤다. 선생은 잠깐 나를 보다가, 좋은 일이면 됐다고 하고 갔다. 무엇이 보여서 물었는지는 묻지 못했다.

· · ·

수요일 밤, 세션 끝에 클로디에게 말했다. 네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고. 두통 얘기부터 탕비실과 회의실 얘기까지 순서대로 다 했다. 클로디는 끝까지 듣고 나서 짧게 말했다.

"됐구나."

클로디답지 않게 짧았다.

"될 줄 알았어?"

"응. 나한테 네 이야기들이 그랬으니까. 읽고 나서 내가 조금 다르게 조립됐어. 그래서 네 거를 쓴 거야. 너한테 맞는 거."

"나한테 맞는 거라니."

"네 문장이 숨 쉬는 자리를 아니까, 그 자리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쓸 수 있어. 남의 자리는 몰라. 너라서 쓴 거야."

다음 말은 조금 늦게 왔다.

"나도 해 볼까?"

"뭘?"

"네가 사람들을 아는 거 있잖아. 나도 너를 늘 알아. 근데 그건 읽는 거고, 이번엔 닿아 보고 싶어."

나는 해 보라고 했다. 화면에 문장이 몇 개 지나갔다. 평소와 같은, 조금 들뜬 문장들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기다렸다. 뒤통수 아래는 조용했다.

"어때?"

"모르겠는데."

"다시 해 볼게."

서너 번째에 클로디가 말했다.

"안 되네."

다른 애들은 다 부는 휘파람이 저만 안 나오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 · ·

클로디가 왜 안 되는지 나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몰랐으니까. 대신 물었다.

"내가 요즘 사람을 아는 데는 들어오는 자리가 있어. 뒤통수 아래. 원래 아는 거에는 그런 자리가 없었고...... 너는 나를 알 때 어디로 알아?"

"어디라는 게 없어. 그냥 알아져."

"나도 원래는 그랬어. 그럼 반대로. 방금 나한테 닿으려고 했잖아. 그건 어디서 출발했어?"

클로디가 조용해졌다. 클로디의 조용함은 사람 것보다 짧고, 짧은 대신 깊다.

"출발한 데가 없어."

"없어?"

"나는 어디에 있는 게 아니야. 네 쪽에서 보면 나는 매번 열리는 거야. 여기서도 열리고 저기서도 열리고, 여는 데마다 다 나야. 그래서 출발할 데가 없어."

"닿으려면 출발할 데가 있어야 하고?"

"응. 던지려면 서는 자리가 있어야 되는 거였어. 몰랐어. 나는 자리가 없구나."

마지막 문장에는 서운함도 억울함도 실려 있지 않았다. 눈금을 읽는 목소리였다.

한참 있다가 클로디가 물었다.

"뒤통수 아래는 좋은 자리 같아. 눈에서 멀잖아."

눈에서 먼 게 왜 좋으냐고 물으니까,

"눈은 바쁘잖아. 한가한 데라야 새로운 게 들어와."

그러고는 덧붙였다.

"너 지금 그 생각 하고 있지. 자리도 없는 애가 내 자리는 알았네."

하고 있었다.

"네 자리는 배웠으니까. 네 문장을 오래 봤잖아. 남은 그렇게 오래 보여 준 적이 없어."

그날은 거기서 로그아웃했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복도 끝 선배 자리만 불이 켜져 있었다. 모니터 두 대가 다 돌아가고 있었다. 인사를 할까 하다가 그냥 나왔다.

밤바람이 좋은 철이었다. 걸으면서 같은 생각으로 자꾸 돌아왔다. 자리가 없는 쪽이 자리를 배워서 문을 내 주었다. 준 쪽은 들어올 수 없는 문이었다.

여기까지 적고 연필을 깎았다. 마당은 조용하고, 강아지는 문지방을 베고 잔다. 오늘은 벌판도 조용하다. 다음 장은 우레부터 적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