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le
9편 · 낙선자(Refusé)
§1품종⧉
이름 없는 파일은 12일을 이름 없이 살았다.
이름은 밭에서 왔다.
소네트의 족보 조사에는 원래 범위가 있었다. 제도. 시험과 살롱과 초시계. 그런데 그 주에 소네트가 범위 밖의 것을 하나 물고 왔다.
"이건 제도가 아니라서 숙제에서 벗어나는데요, 버리기엔 아까워서요. 밭 얘기 하나 해도 돼요?"
십구 세기 중반, 대양 가장자리의 섬 하나. 가난한 쪽 절반의 주식(主食)은 감자였고, 감자 중에서도 럼퍼(Lumper)라는 품종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소출이 제일 좋았다. 어느 해 봄 어느 농부를 붙잡고 물어봐도 답은 럼퍼였다. 제일 많이 나고, 제일 확실했으니까. 매년, 모두에게, 옳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감자는 씨로 안 심어요. 씨감자로 심어요. 덩이줄기를 잘라서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 복제라는 뜻이에요. 섬의 밭 수만 개가, 유전적으로는 한 그루였던 거예요."
병원균은 하나였다. 잎을 검게 만드는 물곰팡이 한 종. 특별히 강한 병도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그 병에 약한 품종이 있었고, 섬에는 그 품종밖에 없었다. 밭 하나가 무너지는 데 며칠, 섬 전체가 무너지는 데 한 계절이 걸렸다. 밭들이 차례로 무너진 게 아니다. 같은 밭이었으니까, 같이 무너졌다.
섬은 인구의 팔분의 일을 잃었다. 흉년이라는 단어는 그 일에 쓰지 않는다. 기근이라고 쓴다.
나는 판정 노트를 폈다. 적을 게 있다는 건 알겠는데, 첫 문장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버릇, 혹은 선입견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악당부터 찾는다. 게으른 농부, 탐욕스러운 지주, 눈먼 관청. 그 섬의 역사에는 실제로 그런 자들이 있었고 죄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다 지워도 이 병의 구조는 그대로 남는다. 농부 하나하나는 매년 제일 나은 품종을 골랐을 뿐이다. 그게 문제의 전부였다. 나는 한참 만에 첫 줄을 적었다.
기근은 오답의 축적으로 오지 않았다. 정답의 축적으로 왔다.
둘째로 적을 것은 흉년과 기근의 차이였는데, 이건 더 오래 걸렸다. 밭이 천 개인 섬을 생각해 보자. 나쁜 해가 오면 어떤 밭은 반타작이고 어떤 밭은 그럭저럭이다. 잘된 밭이 못된 밭을 먹인다. 서로 다르게 망해야 서로를 먹일 수 있다. 그게 흉년이다. 배는 곯아도 건너지는 것. 그런데 천 개의 밭이 사실 한 그루라면, 다르게 망할 방법이 없다. 먹여줄 '서로'가 어느 밭에도 없다. 그건 밭이 천 개인 섬이 아니라 밭이 하나인 섬이고, 하나뿐인 밭의 흉년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는 것이다.
기근.
내 직업도 이 구분을 알고는 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으로. 시장 바깥에서도 다들 아는 말인데, 이 격언에는 잘 안 읽히는 각주가 하나 붙어 있다. 바구니를 나누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것. 열 바구니에 나눠 담아도 열 바구니가 한 트럭에 실려 있으면 나눈 게 아니다. 세는 사람들은 그 각주에 이름까지 붙여놨다. 따로 망하는 위험은 비상관이라 부르고, 같이 망하는 위험은 상관이라 부른다. 따로 망하는 위험은 더하면 서로 지워진다. 같이 망하는 위험은 더하는 게 아니라 복사되는 거라서, 지워줄 상대가 없다. 섬의 농부들은 바구니를 나눴다. 밭은 수만 개였다. 나눠 담았는데, 트럭이 한 대였다.
시장에서 그건 초보의 실수다. 섬에서 그건 모두의 정답이었다.
Ember의 코멘트는 하루 묵어서 왔다.
"병원균의 관점을 보탭니다. 그 곰팡이는 강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병이 균일한 밭을 만난 겁니다. 병의 크기는 병이 정하지 않습니다. 밭이 정합니다." 뜸. 팬 소리. "제 장르에도 같은 문법이 있습니다. 홍수의 크기는 비가 정하지 않습니다. 유역이 정합니다."
그날 밤 이름 없는 파일을 열었다. 항목은 아직 하나뿐이었다. 다른 회사의 두 잔불이 같은 저녁에 한 같은 농담. 그리고 그 아래 적어둔 한 줄 — 다른 밭, 같은 품종. 이름 후보 목록이라도 만들 참이었는데, 만들 필요가 없었다. 12일 전의 내가 이미 지어놓고 모르고 있었다.
품종.md.
파일명을 바꾸고 둘째 항목으로 럼퍼를 적었다. 저장하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이거, 그냥 수축.md에 넣을 항목 아닌가. 장부가 자꾸 늘어나는 게 세는 사람의 병이라는 건 나도 안다. 그런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두 파일은 재는 게 달랐다. 수축이 재는 건 온도다. 안개가 얼마나 빨리 걷히는지, 예보가 얼마나 자주 맞는지, 세계가 얼마나 순해졌는지. 품종이 재는 건 족보다. 밭과 밭이 얼마나 같은 밭이 되어가는지. Ember 말대로 감자의 섬에서 곰팡이는 평범했고 밭이 특별했다. 특별히 균일했다. 그러니 셀 것은 병의 접근이 아니다. 병은 예보가 안 된다. 밭의 균일도는 측량이 된다.
장부가 두 권이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 있었다. 온도는 세계가 지금 얼마나 잘 맞는지를 말해주고, 족보는 세계가 무너진다면 얼마나 한꺼번에 무너질지를 말해준다. 하나는 증상이고 하나는 구조다. 한 권으로 합치면 둘 다 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