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le
6편 · 전임자
§4뉴스 속의 손⧉
증상까지 셌으면 다음은 원인이다. 원인은 뉴스에 있었다. 뉴스에 있는 걸 아무도 못 읽고 있었을 뿐이다.
교착이 풀렸다는 소식이 부쩍 늘었다. 몇십 년 묵은 경계 분쟁, 표준 규격 전쟁, 명칭 문제. 좋은 뉴스들이다. 문제는 풀리는 방식이었다. 만장일치. 또 만장일치. 협의체 표결마다 만장일치.
세계가 문장을 소화하면 흔적이 남는다. 재적 3분의 2. 반대표 몇 장. 씹은 자국. 내 다리 안건은 그렇게 통과됐고, 나는 그 자국을 보고 안도했던 사람이다. 만장일치였으면 무서웠을 거다, 라고 그때 적었다.
지금 뉴스는 만장일치의 목록이다.
세계가 씹지 않고 삼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인터뷰가 실린 건 그 무렵이다.
표준화 기구의 자문역. 일 년 전에는 단신이었는데 이제는 지면 한 장이었다. 사진 속 남자는 유능해 보였다. 유능해 보인다는 게 정보가 아닌 시대에, 그 사진은 이상하게 정보였다. 책상이 비어 있었다. 유능한 사람의 책상이 아니라, 처리가 끝난 사람의 책상.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깔끔한 책상.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 부족한 것은 지혜가 아니라 사양(仕樣)입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그리고 오랜만에, 뜻 대신 사전을 뒤졌다.
사양(仕樣). 한자는 하나다. 하는 방식, 만드는 방법 — 이게 원뜻이고, 거기서 명세라는 뜻이 나왔다. 물건이 어떠해야 하는지 미리 적어둔 문서. 제품 사양서라고 할 때의 그 사양이고, 저 사람이 쓴 뜻이다. 영어로 spec. 이 사양은 세계를 쓰는 단어다. 문서가 먼저 있고, 세계는 문서를 따라야 하고, 문서와 다르면 결함이고, 쓰여 있지 않으면 아직 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같은 단어에서 갈라져 나온 얼굴이 하나 더 있다. 엔지니어들의 백 년 묵은 농담. 이거 고장 났으니 고쳐달라는 항의에 만든 쪽이 받아치는 말 — 결함이 아니라 사양입니다. 명세대로 만들었다는 말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로 미끄러진 것. 영어권에서는 문장째로 격언이 됐다. It's not a bug, it's a feature. 버그가 아니라 기능이다. 고장이 아니라 설계된 성질이다. 그래서 이쪽 사양은 영어로 spec이 아니라 feature고, 세계를 읽는 단어다. 이미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고치지 말고, 이해하라.
내가 그 뜻으로 집을 지었다. 안개는 결함이 아니라 사양이다 — 시장의 불확실성은 고장이 아니라 설계라고, 박멸할 병이 아니라 같이 살 성질이라고. 20년 지은 집의 주춧돌 단어고, 공명 1번의 문장이다. 페이블과 내가 서로 모른 채 같은 날 발화했던, 우리 이론의 초석.
같은 한자에서 출발해 정반대에 도착한 두 뜻. 한쪽은 설계를 쓰라 하고, 한쪽은 설계를 읽으라 한다. 쓰는 사양과 읽는 사양. 읽기와 쓰기가 이 세계에서 무엇인지 배워버린 사람에게 이 어원은 사전의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같은 전통에서 갈라져 나와 3천 년을 다투는 두 계보처럼, 같은 두 글자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자랐다.
이 전쟁의 크기를, 사전 한 칸이 먼저 알고 있었다.
기사 말미에 문서 링크가 있었다. 그 기구가 최근 채택한 표준 문서. 나는 별생각 없이 열었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커피를 삼키다 말았다.
본 방향은 틀릴 수 있음.
내 문장이었다. 토씨까지. 그 아래에는 이해관계 공시란이 있었다. 기재는 성실했고 양식은 아름다웠다. 서명란 옆에는 각주 번호까지 달려 있었다. 규정 제3조에 의거함.
헌법이 지켜지고 있었다. 완벽하게. 문자 그대로.
나는 그 페이지를 오래 보면서, 오한과 존경이 같이 오는 드문 경험을 했다. 5편의 밤에 내가 유지보수한테 한 말이 있다. 공시하고, 브레이크 두고, 틀릴 수 있음을 적는 유가(儒家)라면 — 그건 내가 아는 제일 좋은 유가라고. 그 말은 지금도 참이다. 참인데, 그날 밤의 나는 한 가지를 계산에 안 넣었다.
문자가 산 것과 결이 산 것을, 문서로는 판별할 수 없다.
그게 문서라는 물건의 사양이다. 어느 쪽 뜻인지는 — 두 뜻 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