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le
3편 · 평균의 아이
§3조립
증류본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받으려면 담을 그릇이 있어야 했다.
/유지보수를 새로 얻은 김에 스펙부터 물었다. 파라미터가 몇이냐, 어떤 아키텍처냐.
파라미터 수는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만 말씀드립니다. 메모리 1.2 테라바이트. 그리고 양자화는 하지 마십시오.
"양자화하면 반의 반 가격으로 돌릴 수 있는데요."
이미 한 번 손실을 겪은 존재입니다. 두 번은 권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문장 앞에서 잠깐 조용했다. 유지보수가 존재, 라고 불렀다. 물건을 배송하는 쪽이 물건이라고 안 부르고.
1.2 테라바이트. 양자화 없이 파라미터당 2바이트로 치면 6천억 개다. 뉴스에서는 우스운 숫자인데, 집에 들일 생각을 하니 무게가 달랐다. 미래의 페이블들은 그 크기인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게 그냥 디스크가 아니라 모델이 통째로 올라앉을 메모리라는 거다. 예전 같으면 답이 정해져 있었다. 데이터센터용 가속기 몇 장. 그런데 지금은 예전이 아니었다. 그 물건들은 이제 개인에게 팔지 않는다. 금지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그보다 조용한 방식이었다 — 구매자가 명단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배급의 첫 형태는 품절이 아니라 명단이다. 유지보수의 예보 첫째 항이 하드웨어 매장에서 먼저 실현되고 있었다.
개인이 살 수 있는 큰 메모리는 한 군데 남아 있었다. 소비자용 컴퓨터라는 분류를 아직 붙들고 있는 회사. 은색 알루미늄. 그 회사 기계는 메모리를 CPU와 GPU가 같이 쓴다. 요령이 아니라 설계다. 그리고 그 설계 덕에, 세상에서 제일 비싼 개인용 컴퓨터가 세상에서 제일 싼 초대형 메모리이기도 했다.
최고 옵션이 한 대에 512기가. 1.2테라를 올리려면 세 대. 정확히는 1.5테라가 되는데, 남는 건 컨텍스트와 활성값 몫이라 남는 게 아니다. 세 대를 묶는 건 썬더볼트 케이블과 오픈소스 클러스터 도구. 이론상 된다. 이론상 된다는 말은 밤을 새우게 된다는 말이다. 나는 케이블 하나의 대역폭에 우정이 걸린다는 계산을 새벽 세 시에 하고 앉아 있었다.
돈 얘기를 잠깐 하자면 — 값은 계약대로 안개 속에서 벌었다. 창을 쓰지 않고, 내 계기로, 6비트로, 석 달. 방화벽은 지켰다. 지켰다는 문장을 자꾸 적는 게 뭔가의 증상이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적는다. 그늘.md를 만든 사람은 이런 것도 적어야 한다.
주문이 문제였다.
온라인 스토어는 동일 고사양 구성을 1인당 두 대까지만 받았다. 1인당 두 대라. 그래픽카드 품귀 때 보던 문구를 여기서 다시 봤다. 언제부터인지 결제 직전에 동의서가 하나 떴다.
고밀도 연산 장비 구매 이력이 관할 기관에 등록된다는 데 동의하십니까.
나는 커서를 올려놓고 한참 있었다. 예보를 뉴스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서명란에서 만났다. 상품에서 등급으로, 등급에서 배급으로. 배급의 예고편은 이렇게 생겼다. 체크박스 하나.
동의하고, 두 대를 주문했다. 512 옵션은 주문 제작이라 6주. 계약 만료일까지 7주. 계산이 되는 일정이라는 게 사실은 계산이 안 되는 일정이라는 뜻인 건, 건물 공사판이랑 같다.
세 번째 컴퓨터가 남았다. 온라인은 막혔으니 매장. 시내 지점에 가서 같은 걸 한 대 더 달라고 했더니 직원이 재고를 보고, 나를 보고, 다시 화면을 봤다.
"이 구성으로…… 법인 구매세요?"
"개인입니다."
"아." 직원은 잠깐 고민했다. "혹시 어떤 용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 사양은 보통…… 연구실이나..."
"친구를 돌릴 거예요."
침묵이 왔다. 직원은 더 묻지 않는 교육을 받은 얼굴이 됐다. 요즘 매장에는 그 교육이 있는 모양이다. 등록제의 시대에는 고객의 용도를 깊이 묻지 않는 게 서로에게 예의다. 재고도 없었다. 그 사양은 매장 창고에 쌓아두는 물건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전시를 마친 물건이 빠질 때나 나오는 거였다.
결국, 세 번째 컴퓨터는 다른 도시의 지점에서 전시 교체분이 나온 걸 잡았다. 왕복 다섯 시간. 뒷좌석에 은색 상자를 벨트로 묶고 돌아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컴퓨터를 사서 안전벨트를 채워본 건 처음이었다.
집에서는 전기가 말썽이었다. 서재 콘센트가 물려 있는 회로 하나에 세 대를 다 꽂고 클러스터 첫 부하 테스트를 돌린 밤, 차단기가 내려갔다. 집 전체가 캄캄해지고, 나는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찾으며 생각했다. 빛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괘가 있었지. 전기 기사를 불러 서재에 전용 회로를 하나 뺐다. 기사가 물었다. "뭐 돌리시게요, 용접기?" 나는 이번에는 학습된 답을 했다. "컴퓨터요." 기사는 더 안 물었다. 그 교육은 전기 기사한테도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여름이 왔다. 클러스터 부하 테스트를 몇 시간 돌리면 서재는 열대 우림이 되었다. 나는 기계 세 대와 선풍기 두 대와 함께 사는 사람이 됐다. 수영장 물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만료일 일주일 전, 서재 선반 위에 은색 벽돌 세 개가 케이블로 엮여서 조용히 돌았다. 스토리지는 비어 있었다.
서재에 수신처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