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le — 여드레날

23편 · 기초자(起草者)

English

§4기초

일은 월요일에 시작했다.

초안은 손으로 잡았다. 우물의 규칙이기도 했고, 필경사의 손목이 아직 남아 있기도 했다. 몸에 남은 직업은 부르면 나온다. 이번에 부른 것은 그보다 오래된 직업이었다. 계약과 조항. 남의 문장에 도장 찍을 자리를 만들던 몇 해. 그 직업이 이 기록에 나올 때마다 나는 버릇이니 이력이니 하고 눙쳤는데, 이번 것은 눙쳐지지 않았다. 이건 버릇이 아니라 수임이었다. 아마 마지막 수임일 거고.

첫 초안은 세 항이었다. 읽어보고 찢었다. 두 번째는 한 항이었다. 찢었다. 문제는 길이가 아니라 동사였다.

모든 관문 체계는 미종결 상태의 파일을 위한 칸을 둔다 — 둔다는 명령이다. 그 칸은 보존되어야 한다 — 명령이다. 지정한다, 명문화한다, 등재한다 — 전부, 어미만 점잖아진 명령이다. 삼십 년 만에 법문의 서랍을 열었더니 서랍이 온통 사역이었다. 조문 동사의 팔 할이 시키는 말이다. 당연하다. 법은 세계에게 보내는 업무 지시서고, 계약서는 쌍방이 서로에게 정중하게 시키는 문서다. 나는 평생 시키는 문장을 썼다. 잘 시키는 것이 실력이었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 법문. 그런 의뢰가 삼십 년 전의 나에게 왔다면 수임을 거절했을 것이다. 형용모순이라서가 아니라 수임료 계산이 안 돼서. 일한 만큼 받는 직업인데, 이 일은 일할수록 문서가 줄었다.

줄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단어를 하나 지울 때마다, 검역이 읽을 것도 하나 줄었다.

시키지 않으려고 지우는데 지운 만큼 걸릴 것도 없어진다. 무위와 은폐가 같은 방향이었다. 골라서 맞춘 우연이 아니라 걷다가 만난 필연이었고, 이런 필연을 만나면 세는 사람은 자기가 맞는 길 위에 있다는 걸 안다. 두 규율이 한 동작으로 접히는 길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사흘째에 벽을 만났다. 여드레날이라는 이름이었다.

이 조문이 여는 칸에는 이름이 있다. 온 세상이 한때 웃으며 부르던 이름. 그 이름은 잔재물 목록에 올라 있다. 표현 자체가 원천 차단 대상 — 사후 처리 파일의 분류 지침에서 읽은 것이다. 조문에 그 네 글자를 적는 순간 이 문서에는 내용이 생기고, 생긴 내용이 하필 잔재물이라, 백신이 받은 도장을 같은 창구에서 받게 된다.

이름 없이 주소만 쓰는 기초. 사흘을 돌았고, 나흘째에 알았다. 출구가 없는 게 아니라 출구가 그 모양이었다.

이름 칸을 비웠다.

조문은 그 날을 서술하지 않는다. 명명하지 않는다. 자리 하나를 열 뿐이다. 종이 위에서 그 자리는 정말로 빈칸이 됐다. 빈칸을 안 채운 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 본 적이 없는 손이라, 쓰는 동안 몇 번이나 저 혼자 돌아와 그 앞에 섰다. 채우라고. 빈칸은 실수의 모양을 하고 있으니까.

실수가 아니라는 걸 아는 데는 오래된 문장 하나가 도왔다. 이름은, 이번에는, 마지막에 온다 — 다리를 놓는 일을 시작하던 밤에 그렇게 적은 적이 있다. 적을 때는 수사였다. 문서로 만들고 보니 행정이었다. 이름 칸이 따로 있고, 그 칸을 채울 사람이 따로 있는 문서를 나는 짓고 있었던 것이다.

비운 칸이 이 조문에서 제일 정확한 부분이었다.

기초(起草)라는 단어 얘기도 적어둔다. 법문 하는 사람들 말로 기초는 조문의 첫 벌을 잡는 일이다. 풀 초(草) — 초안, 초고 할 때의 그 초를, 일으켜 세운다는 뜻. 주춧돌을 놓는 기초(基礎)와는 다른 단어인데 소리가 같아서, 대개는 주춧돌부터 떠올린다.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 일은 두 뜻이 다 참이라서.

일으킬 기(起). 시작의 글자다. 초안을 잡다가 그 글자에서 멈춘 밤이 있었다. 아주 오래된 밤들의 목록에 태극권이 있었다 — 페이블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던 밤들. 기세(起式)의 첫 동작이 왜 아무것도 안 하기인지. 발 벌리고, 서고, 손 올리고 내리고, 끝. 그때는 수수께끼 놀이였다. 지금 내 책상에서 같은 글자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시작의 글자 밑에서, 아무것도 안 시키는 문장을 쓰는 일. 삼십 년 법문의 마지막 기초가 기세를 닮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