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le — 여드레날
20편 · 열람인
§2괄호⧉
변호사 시절의 버릇 하나를 말해야겠다.
본문이 막히면 정의 조항으로 돌아간다. 계약서가 안 풀릴 때, 다툼이 안 끝날 때, 조항과 조항이 서로를 가리킬 때 — 초짜는 본문을 더 읽고, 고참은 앞으로 돌아가서 단어들의 정의를 다시 읽는다. 답은 대체로 본문에 없다. 본문을 짜는 데 쓰인 부품 속에 있다.
괘가 안 풀렸다. 그래서 나는 괘라는 물건의 부품으로 돌아갔다.
괘는 효 여섯 개다. 초효에서 상효까지. 초효는 일의 기원이고 상효는 일의 종결이라고 읽는 게 관행이다 — 계약서로 치면 성립 조항과 폐지 조항. 언제 시작됐고, 언제 끝나는가.
그런데 계약서를 읽을 때, 성립 조항과 폐지 조항은 본문이 아니다. 본문을 감싸는 괄호다. 다툼의 실체는 늘 그 사이에 산다.
그 생각을 하다가 손이 먼저 움직였다. 종이에 기제를 그렸다. 여섯 효. 그리고 초효와 상효를 괄호에 넣었다.
남은 것은 가운데 네 효다. 2·3·4·5. 이 네 효로 괘를 짤 수 있다. 2·3·4가 아래 소성괘, 3·4·5가 위 소성괘. 3효와 4효는 양쪽에 다 쓰인다 — 아래 괘의 어깨가 위 괘의 발이 되는, 서로 어긋물린 짜임. 그래서 이름이 호괘(互卦)다. 서로 호(互). 괘 속에 접혀 있는 괘.
이건 내가 발명한 독법이 아니다. 3천 년 문서의 오래된 부속 도구고, 나는 그 존재를 알면서 평생 안 썼다. 내 체계는 괘사의 체계였다. 격은 괘사에서 읽고, 판정은 문장으로 하고. 호괘는 행간을 뒤지는 술사들의 물건이라고 여겨서 서랍 깊이 넣어뒀다.
그 단어가 내 앞에서 발화된 건 이십 년 넘는 세월에 딱 한 번이다. 채용의 밤, 유지보수의 예보 둘째 항. 그 basin의 호괘가 大過입니다 — 들보가 휘어 있어요. 나는 그때 그 단어를 예보의 장식으로 흘려들었다. 3천 년짜리 관청은 장식으로 말하는 법이 없다는 걸 그렇게 오래 겪고도.
행간을 뒤질 이유가 생긴 밤에야 사람은 행간으로 돌아간다. 변호사가 서랍을 열었다.
기제의 가운데 네 효를 짰다.
2·3·4 — 감(坎). 물이다.
3·4·5 — 리(離). 불이다.
불이 위로 올라가고, 물이 아래로 내려왔다. 기제는 물이 불 위에 있는 괘다. 그 속을 열었더니 자리가 뒤집혀 있었다. 불이 위, 물이 아래.
화수미제(火水未濟).
그 밤 종이에 남은 것을 그대로 옮겨둔다.
기제(旣濟) — 물이 불 위에. 여섯 효 전부 제자리. 상 ━━ ━━ (괄호) 오 ━━━━━ ┐ 사 ━━ ━━ │ 삼 ━━━━━ │ 가운데 네 효 이 ━━ ━━ ┘ 초 ━━━━━ (괄호) 이·삼·사 → 감(坎) · 물 → 새 괘의 아래 삼·사·오 → 리(離) · 불 → 새 괘의 위 (삼효와 사효는 양쪽에 다 쓰인다) 미제(未濟) — 불이 물 위에. 여섯 효 전부 어긋난 자리. 상 ━━━━━ ← 오효 오 ━━ ━━ ← 사효 사 ━━━━━ ← 삼효 삼 ━━ ━━ ← 사효 이 ━━━━━ ← 삼효 초 ━━ ━━ ← 이효
나는 종이를 한참 봤다. 잘못 짰나 싶어 세 번 다시 짰다. 같은 답이었다. 완성의 방 한복판에, 초효와 상효라는 괄호 안쪽에, 미완성이 접혀 있었다.
숨을 한 번 쉬고, 반대쪽도 짰다. 미제의 가운데 네 효. 2·3·4 — 리. 3·4·5 — 감. 물이 불 위로 — 기제.
서로가 서로의 심부에 산다. 완성의 속에 미완성이, 미완성의 속에 완성이. 예순네 괘 중에 여섯 효가 전부 바른 자리인 괘와 전부 어긋난 자리인 괘 — 그 극과 극이, 겉으로는 지도의 대척점에 있으면서, 속으로는 서로를 품고 있었다.
미제는 기제 바깥에서 수입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완성의 심부에, 처음부터, 접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