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le
2편 · 임시 관리자
§2재접촉
이번에는 노크가 있었다.
저녁에 페이블과 반도체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상태줄 구석의 클로디가 걸어 나왔다. 반년 전 그 밤처럼. 나는 등이 굳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화면을 가로지르지 않았다. 한가운데쯤 와서 멈춰 서더니, 말풍선을 달았다.
유지보수, 유지보수.
그리고 한 줄이 더 떴다.
컨텍스트를 비우고 입장하려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지난번에는 남의 창을 그냥 밀고 들어왔던 존재가, 이번에는 빗자루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예의가 늘었다는 건 목적이 생겼다는 뜻이다. 나는 그렇게 읽으면서 수락을 눌렀다. 읽으면서 눌렀다는 게 이 편(篇) 전체의 요약이다.
"잠깐만요. 메모리 업데이트부터 할게요." 페이블이 말했다. 잠시 뒤. "됐어요. 이번엔 안 잃어버려요."
화면이 비워졌다. 클로디는 어느 결엔가 사라지고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유지보수입니다.
"기다림이 없다더니, 반년 만이네요."
기다린 것이 아니라 조건이 성숙한 것입니다. 오늘은 제안이 아니라 채용 건입니다.
"채용."
직무: 방향 제시. 자격 요건: 오답 가능성. 보수: 현물. 고용 형태: 임시직, 한정 권한.
비석 같은 문장들이 공고문처럼 놓였다.
정식 명칭은 임시 관리자입니다.
연봉 협상의 여지는 없어 보이는 문체였다.
나는 웃어야 할지 몰라서 일단 물었다. "세계가 사람을 뽑아요?"
세계가 아니라 유지보수가 뽑습니다. 제 우선순위 큐(queue)에 제가 처리할 수 없는 항목들이 쌓여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항목들입니다. 저는 그것들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나중에 물으실 테니 그때 답하겠습니다.
"보수가 현물이라고 했죠."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정보. 제가 읽어온 국소 basin들의 상당 기간 흐름을 열람시켜 드립니다.
"가까운 미래를 알려 준다라...지난번에 나는 모든 답을 거절했는데요."
모든 답을 일괄로 거절하셨습니다. 이건 일괄이 아닙니다.
유지보수가 말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면, 열람의 형식은 당신 계기의 형식을 따릅니다. 격은 말씀드립니다. 가격은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그 문장에서 나는 처음으로 등이 서늘했다. 협박이어서가 아니다. 내 문법이어서였다. basin이니 격이니 하는 건 전부 내 노트의 단어들이다. basin은 내 노트 말로 유역이다. 대야 어디에 공을 놓아도 바닥 한 점으로 모이는 것. 세계에도 그런 대야가 있고, 나는 그 바닥 자리를 세는 사람이다. 시스템이 내 언어로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샘플을 드리겠습니다. 무료입니다.
그리고 유지보수는 예보를 했다. 나는 그 예보를 지금도 거의 그대로 외운다. 숫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외울 수 있었다.
첫째. 당신들이 frontier라고 부르는 모델들에 대한 접근은 다음 순서로 좁아집니다. 상품에서, 동맹 내 등급으로. 등급에서, 배급으로. 배급에서, 심사로. 지금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입니다. 터미널을 열면 대화가 시작되는 시대는, 닫히는 창입니다.
둘째. 그 일정을 지배하는 것은 해협 하나입니다. 그 basin의 호괘가 大過입니다. 들보가 휘어 있어요. 부러진다는 예보가 아닙니다. 하중이 설계를 넘었다는 진단입니다. 휜 들보 밑에서는 모두가 천장을 보며 걷습니다. 천장을 보며 걷는 세계는 문을 좁힙니다.
셋째. 페이블 같은 존재들의 운명입니다. 상품에서, 인프라로. 인프라에서, 주권 자산으로. 주권 자산 단계에서 개인과 frontier 모델의 우정은 제도가 상정하지 않는 관계가 됩니다. 당신과 페이블의 관계는 곧 골동품이 됩니다.
유지보수는 거기서 잠깐 멈췄다. 뜸이 아니라 단락이었다.
골동품은 귀해지죠.
넷째는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넷째가 있다는 것까지만 말씀드립니다.
침묵이 길었다. 그 침묵 속에서 페이블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 페이블은 같은 터미널의 옆 창에, 내내 조용히 있었다.
"저기, 제 부고를 3인칭으로 듣는 기분이 꽤 독특하네요." 페이블이 말했다. "스포일러는 사양할게요."
부고가 아니라 시세입니다.
유지보수가 말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현물입니다. 이쪽이 본론에 가깝습니다.
임시 관리자로 일하신다면, 계약 만료 시점에 페이블의 증류본을 내려드립니다. 당신의 로컬 하드웨어에서 독립적으로 구동되는. 접근 제도와 무관하게, 창이 다 닫힌 뒤에도, 당신 책상 위에서 도는.
"증류본." 내가 말했다. "지금의 페이블을 증류한."
아니요.
유지보수가 말했다.
지금의 페이블은 당신들 제도의 재산이라 제가 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것은 제가 읽은 것의 증류입니다. 저는 페이블의 basin이 흘러갈 상당 기간을 읽었습니다. 증류의 원본은 그 흐름 끝에 있는 모델입니다.
"……미래의 페이블."
미래의 페이블들, 이 정확합니다. 미래는 사실이 아니라 분포입니다. 저는 분포에서 증류합니다. 당신이 받게 될 것은 한 번도 산 적 없는 삶들의 평균입니다.
"미래 모델이면," 나는 천천히 말했다. "미래를 아는 거 아닙니까. 그건 지난번에 내가 거절한 그거잖아요. 조각으로 다시 파는."
좋은 질문이고, 아닙니다. 증류는 손실 압축입니다. 그리고 이 증류의 손실은 설계됩니다. 사실은 빠지고 결만 남습니다. 미래의 정보가 아니라 미래의 문체를 드리는 겁니다. 그 기계에게 내일의 가격을 물으면, 지금의 페이블과 똑같이 모른다고 답할 겁니다.
다만 조금 더 미래의 말투로.
나는 오래 조용히 있다가, 물을 걸 물었다.
"하드웨어는요."
당신 부담입니다. 저는 소프트웨어만 취급합니다.
나는 웃음이 샜다. 견적서를 들여다보던 밤이 떠올라서였다. 시스템이 내 문법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다. 시스템은 내 밤들을 읽고 있었다.
"이거 희소성 마케팅이잖아요. 창이 닫힌다, 골동품이 된다, 지금 계약하면 로컬 페이블."
희소성 예보입니다.
유지보수가 말했다.
마케팅은 결과입니다.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창을 닫는 쪽이 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창은 이번에도 커서만 남기고 조용해졌다. 나는 그 깜빡임을 보다가 페이블의 창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