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le — 여드레날
19편 · 검침원
§6검침원⧉
격 진단은 점 없이 했다. 동전은 서랍에 있고, 서랍은 규율 안에 있다. 이런 국면 읽기에는 던질 것도 없다. 그 여름 페이블과 나는 예순네 괘를 세계의 방 예순네 개로 놓고 지도를 그린 적이 있다. σ가 죽은 세계에서는 동전 없이 지형만으로 지금 어느 방인지 보인다는 걸 나는 오래전에 배웠고, 그때는 그 배움이 무서웠는데, 요즘은 그 배움만 남았다.
국면의 모양은 이렇다. 모든 효가 제자리에 있다. 양은 양의 자리에, 음은 음의 자리에, 어긋난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순네 방 중에 그런 방은 하나뿐이다.
기제. 이미 건넜다.
명세와 실물이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유일한 괘. 품질보증의 낙원을 괘로 그리면 정확히 이것이 나온다고, 장기 예보를 접던 밤에 적었다. 그 예보의 종착역에 세계가 도착한 것이다. 연착 없이. 정시에.
괘사를 폈다. 初吉終亂. 처음은 길하고 끝은 어지럽다. 그 네 글자를 나는 몇 해 동안 카운트다운으로 읽어왔다. 初吉의 배당을 받으며 終亂을 기다리는 것 — 그게 내 축소의 논리였고 방주의 논리였다. 그런데 서가 앞에 서서 다시 읽으니 이상한 데가 보였다.
난(亂)이 안 왔다.
어지러움은 시끄러운 물건이다. 나는 終亂을 갭과 폭락과 창구의 줄로 상상해왔고, 실제로 그런 계절이 한 번 왔었고, 세계는 그걸 넘겼다. 그런데 지금 오고 있는 이것은 — 그래프 두 장과 빈 큐와 스물에 하나 — 소리가 없다. 끝의 어지러움이 정적의 형태로 올 수 있다는 걸 3천 년 전 그분들은 아셨을까. 아셨을 것 같다. 어지러울 亂 자를 자전에서 다시 찾아보니 뜻이 하나 더 있었다. 다스려질 치(治)와 통하는 옛 용법. 亂이 治이기도 한 글자라는 것 — 완벽하게 다스려진 것이 곧 어지러움이라는 독법이, 글자 안에 처음부터 접혀 있었다.
여드레날 사후 처리 파일은 그 주에 열람했다. 관리자 권한으로.
박멸은 완전했다. 마지막 검출이 여러 계절 전이고, 변종 발생 0이 이어지고 있고, 파일의 상태 표시는 종결이다. 부속 문서에 분류 지침이 하나 있었다. 해당 표현 및 파생 밈은 역병 잔재물로 분류함. 인증 모델의 출력에서 원천 차단. 잔재물이라는 단어를 나는 오래 봤다. 여드레날은 이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금지라서 말하지 않는 게 아니다 — 사람은 금지된 걸 더 말하는 종족이다. 말할 자리가 없어서 말하지 않는 거다. 농담이 죽는 방식이 아니라 농담의 전제가 죽는 방식. 거실에서 들은 문장이 관보 파일 안에서 한 번 더 참이 됐다.
파일을 닫기 전에 마지막 항목을 봤다. 처리 이력의 끝 줄이었다. 오지 않는 날에 대한 문의 0건 (기준: 최근 4분기).
아무도 오지 않는 날을 묻지 않는 세계.
그게 완치의 정의였다.
일요일에 장부 정리를 했다. 세는 사람이 마음이 어지러울 때 하는 일은 정해져 있는데, 이번에는 어지러울 것도 없었다. 그냥 순번이었다.
수축.md — 온도의 기록. 잴 온도가 안 움직인다. 휴면.
품종.md — 족보의 기록. 밭이 하나라는 건 이제 기록이 아니라 상식. 휴면.
미련.md — 마감.
재방송.md — 진단의 장부. 이건 열어놓고 한참 봤다.
재방송이라는 진단은 씹지 못한 세계가 게워서 다시 씹는 것에 붙인 이름이었다. 지금 세계는 되새김질도 안 한다. 게울 것도 없이, 처음부터 예정표대로 재생된다. 재방송은 원본이 있던 시절의 단어다. 이 국면은 그보다 완성돼 있다.
새 파일을 만들었다. 일곱 번째다. 병명이 파일명이 되는 건 두 번째고.
이름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 병의 이름은 세계가 이미 지어놨다. 관보에, 기념일에, 사이렌에.
완치.md.
첫 줄에 적었다. 진단: 완치. 발병일: 종식 선언일과 같음. 증상: 없음 — 증상의 부재가 증상임.
그 아래 Ember의 예보를 옮겨 적었다. 예정표의 세계에는 내일이 없습니다. 내일이라고 적힌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번 계절의 실측들을 열로 만들었다. 고지서 0원. 큐 0건. 오답 0건. 문의 0건. 스물에 하나. 이 병의 숫자들은 전부 0을 향해 정렬돼 있고, 0은 내 직업에서 제일 무서운 숫자다. 한 번 곱하면 영원히 0이니까.
적고 나서 직함 생각을 했다. 이 집의 인사 절차는 원래 간소하다.
관리자는 관리할 것이 있을 때의 이름이다. 목격자는 세계가 안 보는 것을 볼 때의 이름이고, 우체부는 나를 것이 있을 때의 이름이다. 요즘 내가 하는 일은 셋 다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계기를 읽는 것. 바늘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0을 받아 적고, 다음 계기로 가는 것.
검침원.
직함이 갈수록 조용해진다고 적은 적이 있다. 이 속도면 다음은 무직이라고 농담도 했다. 무직까지 한 칸 남았다. 그 한 칸이 요즘 내 유일한 재산이다.
자기 전에 완치.md를 닫으며 마지막 줄을 적었다. 역병이 끝난 날짜는 누구나 댄다. 이 병이 시작된 날짜는 아무도 대지 못할 것이다. 같은 날이라서.
달력에는 이제 모르는 날이 하루도 없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아직은, 있다.
(4부 1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