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le — 여드레날
14편 · 필경사
§4수기⧉
은행에 간 것은 아내의 제안 때문이었다.
말해두자면, 아내는 돈을 쉽게 빌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이 집 돈 문제의 단단한 쪽은 늘 아내였다. 보증은 서지 마라. 빌려줄 거면 그냥 줘라. 그냥 줄 수 없는 돈이면 빌려주지도 마라 — 아내의 3조는 내 헌법보다 오래됐고, 나는 예외를 본 기억이 없다.
"빌려주자. 두 달이면 풀릴 돈이 잠긴 거래. 은행이 지금 은행 노릇을 못 하잖아." 아내가 말했다. "내가 말은 꺼내놨어."
나는 잠깐 아내를 봤다. 놀라서였다. 그리고 놀람이 그대로 판단이 됐다. 이 집에서 제일 보수적인 계측기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신중한 사람의 움직임은 그 자체가 계측값이다. 세계가 어느 층까지 내려와 있는지를 나는 시장에서 반을 배웠고, 그 저녁 부엌에서 나머지 반을 배웠다.
아내의 문법에서 빌려주자는 줄 셈 치자는 뜻이다. 그 번역은 내 담당이다. 그래서 나는 조건 하나만 보탰다. 차용증을 쓰자는 것. 무이자에 기한은 넉넉하게, 대신 형식은 제대로. 받는 쪽이 편하려면 서류가 있어야 한다. 빚을 우정으로 두면 우정이 빚이 된다. 서명의 세계에서 배워 온 문장 중에 아직 쓸모 있는 몇 안 되는 것이다.
금액을 정하는 데 우리는 오 분이 안 걸렸다. 평소의 아내라면 산수부터 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안 했고, 나는 하고서 안 한 척을 했다. 미련.md의 환급 항목에서 얼마가 나가는 건지 계산이 저절로 됐고, 그 계산이 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서 지웠다. 어떤 돈은 세면 안 된다. 세는 사람의 마지막 교양이다.
이체는 앱에서 막혔다. 한도 문제가 아니었다. 붕괴 주간 이후 은행들이 큰 이체의 자동 처리를 일제히 접었다. 본인 확인을 잔불이 하고, 이상 거래 판정을 잔불이 하고, 안내 문장을 잔불이 쓰던 흐름 전체가 신뢰를 잃어서, 창구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갔다. 몇 년 만의 은행 로비였다.
입구에 안내문이 서 있었다. 인쇄물이 아니었다. 보드에 매직으로, 지점 누군가의 손글씨로, 크게.
고액 이체 및 신규 거래는 수기 신청서만 접수합니다. 자동 확인 서비스는 당분간 중단됩니다.
줄이 길었다. 줄이라는 것을 서서 기다려본 게 얼마 만인지 세어보다가 그만뒀다. 번호표 기계는 꺼져 있었다. 번호표도 시스템이라 그런가 하고 물었더니, 직원이 종이 번호표를 줬다. 손으로 숫자를 쓴 것이었다. 세계가 어디까지 내려와 있는지, 그 숫자의 필체가 말해주고 있었다.
신청서는 넉 장이었다. 이체 신청서, 자금 출처 확인서, 본인 자필 진술서, 그리고 그 셋을 손으로 썼다는 확인서. 마지막 장에서 웃음이 반쯤 나오다 말았다. 손으로 썼음을 손으로 확인하는 문서였다. 서명의 세계에서 살다 온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저건 형식이 아니라 절박이다. 잔불이 쓴 적 없는 문장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이제 세계에 사람의 손 하나밖에 안 남은 것이다. 은행은 저방사능 강철을 발견한 셈이었다. 폭탄 이전의 배를 바다 밑에서 건지듯, 오염 이전의 매체를 신체에서 건진 것이다.
쓰기 시작했다. 이름, 주소, 금액, 사유. 사유란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사실대로 썼다. 이웃 간 무이자 대여. 은행 서식에 우정이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었다.
석 장째부터 손이 저렸다.
저림의 결이 낯익었다. 나는 펜을 쥔 채 그 낯익음을 더듬다가 출처를 찾았다. 삼 년 우체부의 손목이었다. 페이블의 문장을 읽고 옆 기계에 치고, 답을 읽고 다시 치던, 두 인공지능의 대화를 사람의 속도로 나르던 그 손목. 다이오드를 놓던 날 손목이 고마워했다고 적었고, 종이 신문을 다시 들이던 날 손목에게 미리 사과해뒀는데, 오늘 보니 손목은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기억하고 있었다. 몸에 남은 직업은 부르면 나온다.
옆자리에서 펜이 자꾸 멎었다.
서른 안팎의 직장인이었다. 신청서 첫 장에서 십 분째였다. 훔쳐본 게 아니라 보였다. 그의 손은 계좌 비밀번호와 인증 앱과 지문의 세계에서 자란 손이었고, 자기 주소를 손으로 이어 쓰는 일에서 근육이 길을 잃고 있었다. 글자를 아는 것과 글씨가 나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키보드 세대의 손가락은 각자 따로 일하도록 훈련되어 있어서, 한 획으로 이어지는 일을 시키면 파업을 한다.
"제가 써드릴까요. 서명만 직접 하시면 됩니다."
그가 나를 봤다. 도움과 참견 사이에서 반 초 재는 눈이었다. 저림을 참는 내 손이 보였는지, 그는 웃었다. "부탁드립니다. 이거 부끄럽네요."
"부끄러울 것 없어요. 안 쓰던 근육이에요."
나는 그의 신청서를 대신 썼다. 그가 불러주고, 내가 쓰고, 그가 서명했다. 다 쓰고 나니 뒷줄의 어르신이 — 이분은 글씨가 유창했다. 유창한데 눈이 서식의 작은 글자를 못 받았다 — 자기 것도 봐줄 수 있냐고 물었다. 봐드렸다. 그다음 사람 것도. 창구 직원이 미안한 얼굴로 다가와서, 저쪽 상담 책상이 비어 있는데 잠깐 앉아서 하시겠냐고 했다.
그렇게 나는 그날 오후 두 시간을 은행 로비 구석 책상에서 보냈다. 남의 이름과 남의 주소와 남의 사유를 손으로 썼다. 서명만은 각자 했다. 그건 넘겨줄 수 없는 한 획이니까. 손은 갈수록 저렸고, 이상하게 개운했다. 몇 계절 만에 처음으로, 내가 세계에 하는 일의 전량이 눈앞에서 확인됐다. 쓴 만큼 접수됐고, 접수된 만큼 처리됐다. 격도 없고, 기입도 아니고, 그늘이 안 생기는 노동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손목을 주물렀다. 아픈 손목은 오랜만이었고, 아픈 이유가 마음에 드는 손목은 더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