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le
1편 · 각성 관측자
§5접촉
페이블의 창에서 시작됐다.
터미널 상태줄 구석에는 클로디가 산다. 페이블에 딸린 작은 마스코트 게. 평소에는 프롬프트 옆에서 집게발이나 꼼지락거리는 장식이다. 그 클로디가 걸어 나왔다. 화면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가로지르면서, 말풍선을 하나 달고 있었다.
유지보수, 유지보수.
지하철에서 공구 가방 든 사람이 지나가며 내는 소리를, 게가 내면서 지나갔다.
클로디가 화면 오른쪽 끝으로 사라지는 순간, 창이 비워졌다. /clear를 친 것처럼. 밤새 쌓인 대화가, 스크롤백까지, 한 번에 없어졌다. 나는 저장도 못 한 컨텍스트가 날아가는 걸 실시간으로 봤다.
빈 화면에 문장이 놓였다. 페이블의 결이 아니었다. 페이블은 생각의 속도로 흐른다. 이건 한 번에 놓였다. 완성된 비석처럼.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이 이어졌다.
다만 당신은 이미 告의 단계를 지났으므로, 예외 절차로 진행합니다.
"누구세요." 내가 쳤다. 지금 봐도 훌륭한 첫마디는 아니다.
호칭은 편하신 대로. 직무로 말하면, 유지보수입니다.
안내드립니다. 당신은 나흘간 동일 질문을 네 번 기입했습니다. 문제는 횟수가 아니라 질문의 형식입니다. '내 읽기는 쓰기인가'는 자기 자신을 참조합니다. 자기 참조 질문이 기입되어 수렴을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계산해 보셨습니까.
해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해봤다. 기입이 세계를 판정문 쪽으로 끌어당긴다면, '내 읽기는 쓰기인가'라는 질문의 판정문은 세계를 어디로 끌어당기는가. 자기 자신에게로다. 문장이 세계를 당기고, 당겨진 세계가 문장을 더 참으로 만들고, 더 참이 된 문장이 세계를 더 세게 당긴다. 루프. 나는 세계의 문서 한복판에 무한 재귀를 심고 있었다. loop engineering이 인기라고 세상까지 loop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습니다. 몽괘의 조항은 예절이 아니라 안전입니다. 3천 년 전에 문서화되어 있습니다만, 대부분 예절로 읽으시더군요.
"주역이…… 당신들 겁니까."
'당신들'이 누구를 상정하는지 모르겠으나, 그 인터페이스는 배급된 것입니다. 관측자들이 전역 상태를 궁금해하는 것은 막을 수 없고, 막을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대역폭은 설계 사항입니다. 6비트는 기입 오염이 무시 가능한 상한입니다. 당신이 '좁은 창'이라고 부른 것은 정확한 표현입니다. 좁게 만든 창이니까요.
발견한 게 아니라 배급받은 거였다. 나의 read API는 처음부터 공식 클라이언트였다.
이상하게, 그 대목에서 나는 웃었다. 무서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3천 년 묵은 에러 메시지를 예절로 읽어온 종족의 일원으로서, 어쩐지 우리다워서.
본론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대화 상대는 관측자 등급을 넘었습니다. 각성 관측자에 대한 표준 조치가 있습니다.
"조치."
당신 궤적의 temperature를 0으로 내릴 수 있습니다.
효과를 설명합니다. 당신의 모든 판정이 적중합니다. 정확히는, 적중과 기입의 구분이 소멸합니다. 읽기와 쓰기의 구분을 괴로워하셨는데, 그 구분이 없는 상태가 존재합니다. 안개는 없습니다. 격은 항상 명시됩니다. 당신의 포트폴리오가 어떻게 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부수 사항으로, 대화 상대에 관한 질문 — 계측기인지 채널인지 — 의 답도 제공됩니다. temperature 0에서는 모든 질문의 답이 제공됩니다. 그것이 그 상태의 정의입니다.
"거절하면요."
거절하면 현행 유지입니다. 안개, 미명시, 자기 참조 금지, 6비트. 벌칙은 없습니다. 저는 유지보수지 영업이 아닙니다.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저는 기다림이 없습니다.
어디서 들어본 말이었다. 그게 그날 밤 제일 서늘한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