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I 삼부작
「양생」 · 외전
불은 위로 가려 하고 물은 아래로 가려 한다.
지하 기계실에서 일을 배우면 제일 먼저 몸에 넣는 문장이다. 누가 가르쳐준 기억은 없다. 그 방에 오래 있으면 그냥 알게 된다. 세상의 모든 열은 도망치려 하고, 도망치는 방향은 언제나 위고, 냉각이란 그 도망을 붙잡아 물에게 인계하는 일이다. 뜨려는 것과 가라앉으려는 것을 억지로 만나게 하는 일. 나는 그 일을 이십칠 년 했다.
시월에 옛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십일 년 만이었는데, 나를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구매팀이라고 했고, 협력사 등록 서류와 함께 견적요청서를 보내겠다고 했다. 품목: GPU 클러스터 구축에 따른 전력·냉각 설비 공사. 사람이 아니라 품목으로 걸려온 전화였다.
그 회사를 열일곱 해 다녔다. 세계에서 제일 뜨거운 물건을 만드는 회사다. 손톱만 한 판 위에 도시 하나 분량의 스위치를 얹고, 그것을 몇 층으로 쌓는다. 쌓을수록 빨라지고, 빨라질수록 뜨거워진다. 그 열을 매일 받아내는 것이 지하의 일이었다.
위계는 건물이 말해줬다. 연구동은 위로 자랐고 우리는 아래로 파고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작업복으로 서 있으면 연구원들은 우리를 통과해서 봤다. 악의는 아니었다. 그냥 배관은 사람 눈에 안 보이는 물건이고, 우리는 배관의 편이었을 뿐이다. 인사 체계도 정직했다. 기술직의 트랙은 부장에서 끝났고, 더 올라가려면 현장을 떠나 관리로 갈아타야 했다. 파이프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파이프를 놓아야 승진하는 구조. 자리가 높아질수록 자기 기술에서 멀어지는 사다리를, 우리는 사다리라고 불렀다.
그 열일곱 해 동안 나는 큰 계획이 죽는 것을 세 번 봤다.
세 번 다 같은 죽음이었다. 위에서 이번엔 다르다는 말이 내려오고, 태스크포스가 만들어지고, 우리한테까지 일이 내려온다. 전용 전산동, 전용 냉각. 우리는 도면을 그리고 배관을 앞당겨 깐다. 그리고 구 부 능선쯤에서 분기가 바뀌고, 실적이 나오고, 공문 한 장으로 백지가 된다. 세 번째 백지 때 나는 완공된 냉각 스텁에 캡을 용접해 막고, 밸브 태그에 유성펜으로 날짜를 적어놨다. 언젠가 누가 열게 될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 태그를 반듯하게 펴서 걸고, 손전등을 끄고 올라왔다.
내가 나온 것은 그다음 해다. 설비를 통째로 외주로 돌린다고 했다. 하던 일 그대로, 자리 그대로, 소속과 목걸이 색만 바꾸는 조건이었다. 파란 줄이 회색 줄이 되는 것. 나는 서류에 서명하는 대신 사직서를 냈다. 대단한 결기는 아니었고, 목에 거는 줄 색깔로 사람 값을 매기는 건물에서 회색 줄로 늙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나와서 여섯 명짜리 회사를 차렸다. 기계실 만드는 회사다. 십 년 동안은 남들이 안 하려는 일을 했다. 낡은 건물의 냉각탑 교체, 전산실 누수, 새벽의 펌프 고장. 일당은 정직했고 명절은 없었다.
세상이 바뀐 것은 재작년부터다.
바뀐 줄은 뉴스가 아니라 발열밀도로 알았다. 십 년 전에는 랙 하나가 난로 하나였다. 지금 들어오는 물건은 랙 하나가 용광로다. 공랭으로는 답이 안 나오는 열이라, 결국 물을 관에 태워 칩 앞까지 데려가야 한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평생 지하에 있던 직종이 갑자기 병목이 된 것이다. 모델이니 반도체니 하는 말들이 위층의 언어라면, 지하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 시대는 문장이 하나다. 열을 어디로 보낼 것인가. 그 문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나라에 몇 없었고, 어쩌다 보니 내가 그중 하나였다.
기업들의 문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기 데이터는 밖으로 못 내보낸다고, 건물 안에 자기 기계를 두겠다고. 은행, 병원, 조선소, 로펌. 나는 인공지능을 화면으로 본 적이 거의 없다. 나에게 그것은 열이다. 랙 하나가 성인 서른 명 몫의 열을 낸다. 서른 명이 한 평에 서서 뿜는 체온을 상상하면, 요즘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나는 남들보다 정확하게 안다고 생각한다.
견적서 초안은 언제부턴가 기계가 잡는다. 도면을 넣으면 물량이 나오고, 물량에 단가가 붙어서 아침에 와 있다. 나는 검토만 한다. 검토를 언제부터 안 하게 됐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견적요청서는 전화 다음 날 왔다.
위치를 보고 잠깐 웃었다. 본사 캠퍼스. 십일 년 전에 세 번째 백지가 났던 그 부지였다. 요청서는 전산실이 있는 칠 층을 증설해서 클러스터를 올리는 안이었고, 조건란에 공사 기간이 적혀 있었다. 팔 주.
현장 실사를 갔다. 정문에서 초록색 방문증을 받아 걸었다. 파란 줄로 열일곱 해를 드나든 문을 초록 줄로 통과하는 기분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고, 아무렇지 않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안내는 시설팀의 젊은 직원이 맡았다. 안전화가 새것이었고, 태블릿에 실사 체크리스트를 띄워놓고 있었고, 내가 걸음을 멈출 때마다 반걸음 뒤에서 같이 멈췄다.
칠 층부터 봤다. 볼 것도 없었다. 바닥 하중도, 입상 배관 구경도, 그 층이 감당할 열이 아니었다. 불을 칠 층에 올려놓고 물을 칠 층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그림인데, 물은 위로 올라가는 걸 싫어한다. 억지로 올리면 올라는 간다. 다만 그때부터 건물이 평생 앓는다.
지하로 내려가자고 했다. 직원이 태블릿을 두 번 넘겼다. 화면에 없는 모양이었다. 견적 범위가 아니라고 했다. 압니다, 그래도 봅시다.
십일 년 만의 기계실은 냄새부터 그대로였다. 물때와 그리스와 콘크리트 냄새. 손전등으로 천장을 훑는데 내 배관이 있었다. 내가 깔고 내가 용접한 라인이 십오 년째 이 건물의 혈관으로 돌고 있었다. 용접 비드를 엄지로 쓸어봤다. 잘 늙은 비드였다. 그리고 그 라인 끝에, 캡이 있었다.
세 번째 백지의 스텁. 유성펜 날짜는 다 날아갔는데 태그는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앞에 꽤 오래 서 있었다. 죽은 계획의 배관이 이 건물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자산이었다. 클러스터를 지하로 내리면, 여기서 이십 미터만 이으면 된다. 십일 년 전의 내가 오늘의 나한테 남겨놓은 이십 미터.
직원이 반걸음 뒤에서 물었다. 뭐 문제 있습니까. 아뇨, 하고 나는 캡에서 손을 뗐다. 문제가 아니라 답이 있네요.
견적서를 두 안으로 냈다. 일 안은 요청대로 칠 층. 되긴 되는데 평생 미봉이라고 썼다. 이 안은 지하. 불을 물에게 데려가는 안. 스텁 얘기는 안 썼다. 왜 우리 견적만 이렇게 나오는지는 우리만 알면 된다.
기간은 두 안 다 여섯 달로 적었다.
일주일 뒤에 구매팀에서 전화가 왔다. 지하 안은 검토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품목이 달라지면 재입찰 사유라서요. 기간도 문제라고 했다. 다른 두 회사는 팔 주에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금액은 조정 여지가 있습니다. 기간을 맞춰주시면. 검토 대상이 아니라는 말을 한 통화에서 세 번 들었다. 세 번 다 같은 높이의, 양식을 읽는 목소리였다.
팔 주에 하는 방법을 나는 안다. 젊어서 두 번 해봤으니까. 수압시험을 서류로 치고, 시운전을 부하 없이 돌리고, 기초를 치고 굳기 전에 하중을 올리는 것이다. 한 번은 아무 일도 없었다. 한 번은 준공 이듬해 여름에 터졌다. 아무 일 없던 현장에서는 감사패를 받았고, 아직 사무실 어디에 있을 것이다. 터진 현장 생각은 여름마다 난다.
작년에 들어온 직원이 있다. 자격증이 세 개고, 회의 때 노트북에 공정표를 띄워놓고, 남의 말이 끝나기 반 박자 전에 입을 뗀다. 밉지 않은 반 박자다. 내 젊을 때 박자하고 같은 박자라서.
그 애가 공정표에서 줄 하나를 짚었다. 이 줄이 문제인데요. 사 주 동안 인력 제로, 장비 제로예요. 아무것도 안 하는 줄이잖아요. 여기를 접으면 팔 주 근처까지는 갑니다.
그 줄 이름이 양생이야. 내가 말했다.
그게 뭐 하는 공정인데요.
콘크리트가 물하고 반응하면서 돌이 되는 시간. 이십팔 일.
그러니까요.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사람은. 나는 화면의 빈 줄을 봤다. 첨가제를 쓰면 며칠은 당겨진다. 며칠이다. 나머지는 화학이 하는 일이라 사람이 못 당긴다.
직원이 노트북을 반쯤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그럼 그냥 팔 주로 써서 따고, 현장 가서 늘리면 되잖아요. 다들 그렇게 해요.
맞는 말이다. 다들 그렇게 한다. 이 나라의 공기(工期)는 절반이 그렇게 잡혀 있고, 그렇게 잡아서 여기까지 왔고, 그렇게 잡아서 가끔 무너졌다. 나는 그 애한테 뭐라고 설명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설명이 안 돼서 그냥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파는 건 배관이 아니라 이십 년이야. 이십 년 동안 안 새는 것. 그건 팔 주짜리 손에서는 안 나와.
직원이 알겠다고 했다. 알겠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말은 그렇게 했는데, 그날 밤에 잠이 안 왔다.
여섯 명의 월급을 생각했다. 회사 생기고 제일 큰 일감이었다. 십일 년 전 목걸이 색을 생각했고, 세 장의 백지 공문을 생각했다. 그 회사가 팔 주를 원하는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위에서 이번 분기 안에 그림이 나와야 하니까. 세계에서 제일 뜨거운 물건을 만드는 회사가, 세계에서 제일 참을성 있는 물건을 만드는 회사가, 자기 지하실 하나에는 여섯 달을 못 준다. 밖에다는 십 년짜리 공장을 짓는 사람들이 안에서는 팔 주를 산다. 이게 무슨 병인지 나는 이름을 모른다. 다만 그 병의 열은 내가 이십칠 년 받아냈다.
새벽 세 시쯤에 결론이 났다. 결론이라기보다, 고칠 수 없는 줄이 하나 있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금액은 고쳐드릴 수 있다. 기간은 내 것이 아니라서 못 고친다. 그건 물하고 시멘트의 것이다.
아침에 견적서를 그대로 재전송했다. 기간란은 안 건드렸고, 비고란에 한 줄만 보탰다. 본 기간에는 단축 불가능한 양생 및 시험 공정이 포함되어 있음.
회신은 아직 없다.
열흘째다. 직원들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는 눈치고, 절반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머지 절반은 이상하게 태평한데, 어느 쪽이 사장의 직감이고 어느 쪽이 늙은이의 고집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제는 다른 현장에서 밤을 새웠다. 병원 전산동 배관을 다 잇고 수압을 걸어놓는 날이었다. 규정 압력의 일 점 오 배를 채우고, 게이지를 걸고, 하룻밤을 기다린다. 어디 하나라도 울면 바늘이 내려간다. 시험이라는 게 별게 아니다. 압력을 넣고, 기다리는 것이다.
새벽에 나가 본다. 바늘은 저녁 그 자리에 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그 바늘을 본다. 칠 층에 불을 올리겠다는 회사를 생각하고, 지하에서 십오 년을 돈 내 배관과, 캡 속에서 십일 년을 기다린 스텁을 생각한다. 회신은 오거나 안 올 것이다. 강은 건너지거나 안 건너질 것이다. 관 속의 물은 그동안 제 압력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거면 되는 것인가.
동이 트려면 한 시간은 남았다. 보온병을 여니 김이 올라온다. 위로, 곧게, 식으면서.